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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모음

순환 논리, 너무 당연해 벗어날 수 없는!

psyglow 2025. 4. 24. 12:56

변증법적 행동치료(DBT)의 창시자 Linehan의 자서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기 초반 그(교수)는 내게 내가 제시한 어떤 주장을 옹호해 보라고 주문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장을 펼치는데 그는 도중에 내 말을 끊었다.
“학생의 주장은 순환적이에요.” 그는 말했다.
“주장을 뒷받침할 정보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요.”
순환적 사고(Circular Thinking)라는 말은 생전 처음 들었다. 교수님은 순환적 사고가 무엇인지 설명했고 나는 그때까지 내 사고방식의 많은 부분이 순환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강의 중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가 크게 당황했으리라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순수한 기쁨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그렇다면 순환적 사고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는 어떤 주장을 입증하려고 하면서 자신이 입증하려는 것이 이미 참이라는 가정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존 : 나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어.
수전 :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이유가 뭐야?
존 : 성경에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쓰여 있으니까.
수전 : 성경은 왜 믿는데?
존 : 하느님이 성경을 만드셨으니까.

(출처 : 인생이 지옥처럼 느껴질 때)

순환 논리(Circular logic)는 저 예시처럼 이런 형식을 띱니다.
“A가 참이기 때문에 B는 참입니다. B가 참이기 때문에 A가 참입니다.”
단지 이 문장만을 보고 있으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싶겠죠.
심리치료를 하다보면 이런 상황이 발생합니다.
내담자 : 그 사람이 내 말을 무시한 거 보면 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게 분명해요.
치료자 : 어떤 행동 때문에 무시로 여겨지던가요?
내담자 : 표정이 아주 못마땅하고 제가 말한 것에 아무 반응도 안 했어요. 절 아주 업신 여겨서 그런 거예요.. 사람들은 왜 날 이렇게 싫어라 할까요?
아! 되돌이표죠. 그러나 저것이 내담자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저 논리가 맞으려면 상대가 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가 사실이 되어야 하지요. 그리고 저 논리에 빠져있는 사람은 B에 앞선 A라는 명제가 참이지 않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일단 내 판단에 상대가 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가 들어서면 왜 그럴지에 대한 이유들은 갖다 붙이기 나름인데, 이유를 떠올려내는 그 상상력에 감탄이 나오기도 합니다. (처음 자기를 봤을 때 입만 웃고 눈은 요상하게 응시했다 같은 걸 이유로 들며 확신에 차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순환 논리는 저 영속된 회전의 순환에서 우리의 사고가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의 변수가 들어올 틈을 주지 않게 되지요. 이는 결국 생산적이고 유용한 사고 전환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을 열심히 하지만 그 노력만큼 이득은 거의 없게 되지요.
자신처럼 힘든 경계선 성격 혹은 감정조절불능인 환자들을 위해 DBT라는 치료기법을 만들었던 Linehan이 자신의 학업 과정에서 저 경험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겼다는 것이 저는 탁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Linehan이 어쩌면 자신의 정서장애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날 단초가 되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교수의 반박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Linehan을 사람으로서 존경심이 들었습니다(물론 DBT 책을 여럿 보면서 Linehan의 사고방식에 학을 뗀 경험이 자주 있기는 합니다. 친해질 사람으로서는 다소 꺼려지는...)
어쨌든 저런 순환논리에서 벗어나려면 A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반대 증거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내 마음을 꽤 거스르는 일일 지라도요.
심리치료의 길에 들어선 후 어느 순간부터 치료자는 내담자가 과학자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전문가 선생님들의 말들을 관습적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자기 자신 하나를 놓고 볼 때 잘 관찰하고, 실험하고, 그 결과를 다시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충분히 근거가 마련된 원인과 결과를 도출하여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사고의 과정을 치료자가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인간을 괴롭게 하는 인지적 오류의 종류는 참 다양하게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독 순환 논리처럼 다른 인지적 오류들보다 우리가 더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는 속성을 지닌 것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 사람의 믿음은 그만큼 맹목적이니까요.